들어가며
한반도 최남단인 전남 진도. 230개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진도군은 예로부터 시(詩)·서(書)·화(畵)·창(唱)의 찬란한 문화 예술을 꽃피워 예술의 본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게다가 진도는 땅이 기름 지고 농사가 번창해서 옥주라고도 부른다. 한 해 농사 지어 삼년을 먹는다라는 말이 아직 까지 내려올 정도로 물산과 인심이 넉넉한 고장이다. 이런 독특한 예향(藝鄕) 진도에 아직도 불멸의 충혼이 서려 있는 호국유적지인 삼별초(三別抄)의 항몽 전적지와 이충무공의 명량대첩지가 있다는 사실은 진도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묻게 한다.
| 진도 남박다리 쌍홍교 | 
진도군 임회면에 있는 사적 127호인 남도석성(南桃石城)이 바로 대몽 항쟁의 전적지이다. 남도석성은 백제시대 매구리현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여겨지는데 고려 원종(1259∼ 1274 ) 때 배중손 장군이 삼별초군을 이끌고 진도로 남하하여 대몽 항쟁의 근거지로 삼고 최후까지 격전을 벌인 곳이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이성을 쌓았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삼국 시대부터 이곳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성이 있었고, 그후 시대에 따라 여러 차례 개축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 장수 1명이 귀양을 와서 성을 축성해 그 자손과 같이 생활하였으나 성밖의 사람하고는 신분이 달라 서로 내왕하지 않았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 (萬戶府)가 처음 생긴것이 조선 세종 20년 정월이므로 1438년 이후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1214년부터 1259년에 걸쳐 왜구가 연해지방을 침범하여 1350년 (고려 충정왕 2년)에는 진도의 관아를 내륙 지방으로 옮기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러한 교치생활(僑置生活)은 조선 시대에도 계속되어 오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진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은 축성 시기가 1438년 이후임을 더욱 뒷받침한다. 특히, 남도포 석성(石城)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오른쪽으로 가는 바닷길의 요지이며, 동시에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목 줄기에 해당되는 요새였다. 성안에는 김방겸과 배중손의 후손 들이 집단으로 취락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으며, 현재는 성안에 20호 정도의 가구가 살고 있다.
옛 모습 되찾은 평지성
남도석성은 높이 4∼ 6m , 폭은 2.5 ∼ 3m 가량이며 둘레가 610m인 옛 성이다. 둥그런 성벽과 동문, 서문, 남문이 거의 그대 로 있으며, 서문 양옆에 밖으로 치(雉)가 나와 있다. 남도석성의 본래 규모는 둘레 1,233척, 높이 8척이고 샘과 우물이 각 1 개씩 있었다고 한다. 또한, 1765년(영조 41년)에는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 堞)이 43개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성지 (城址)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석성(石城)은 평탄한 대지 위에 축조된 평지성(平地城)으로 현재 남동리(南洞里) 마을의 대부분을 감싸고 있다.
성곽의 형태는 동벽(東壁) 82m , 서벽(西壁) 114m , 남벽(南 壁) 165m인 데서 나타나듯 동벽이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구형(矩形)이다. 성벽은 1.1m 내외의 장대석을 성기(城基)로 구축 한 다음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를 사용 하였다. 석재는 방형(方形) 및 장방형(長方 形)의 판석형(板石形)으로 대체로 큰 석재 사이에 작은 석재를 끼워 고임돌로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성곽(城郭)은 1984년에 남벽을 복원하였으며, 1987년에 동문 옹성과 북벽, 그리고 1988년 서문과 남문 사이 치(雉)구간, 동문 우측에서 동북치(雉) 구간을 복원하였으며 나머지 구간은 그런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성곽의 네 모퉁이에는 치성이 현존하는 데 동북치는 길이 4.9m에 폭 4.6m , 서남 치는 길이 5.5m , 폭 4.5m로 1988년에 복원되었다. 동남치는 길이 5.5m , 폭 4.5m , 높이 3.7m로 상부가 유실되었으며 서북치는 길이 5.1m 폭 3.8m로 석재는 이완·탈락되었지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남도석성에는 아직도 마을의 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동문·서문·남문의 3개의 문지가 남아 있는데 그 규모는 각각 폭 2m , 3m , 3.7m이다. 서문지와 동문지에는 문지 초석이 잔존한다. 초석은 장대석(90 ×50 ㎝ )으로 직경 20㎝ , 깊이 12㎝의 문지도리 구멍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옛 성문을 통해 출입한다.
| 진도 남도석성 | 
| 진도 남도석성 | 
편마암질 판석을 겹쳐 세워 홍교 건설
남도석성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홍교와 단홍교 등 두개의 홍교가 놓여 있다. 바로 전국에서 보기 드문 남박다리이다. 남문 바로 앞에 쌍홍교가 있고 이로부터 약 9m 하류 거리에 단홍교가 위치하고 있다. 단홍교가 언제 놓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원종 때 삼별초 군인들이 진도에서 주둔할 때 해안 방어를 위해 남박다리를 쌓은 것이라 하며 삼별초군이 제주도로 건너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도 전해온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성밖 출입을 위해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쌍홍교는 해방 직후에 마을 사람들이 놓았다고 한다. 남박다리는 성남쪽에 있는 다리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도석성에는 남박다리 외에도 성 밖에 있다고 하여 성박 다리, 그리고 성 동쪽에 동박다리가 있었는데 성박다리와 동박다리는 현존하지 않고 위치만 확인된다. 동박다리는 큰 돌을 놓고 건너던 징검다리였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콘크리트 다리가 대신하고 있다. 남박다리는 남해 바다로 나가기 위한 가교 역할도 하였는데 바닷물이 다리 근처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남박다리는 각각 길이 5.5m , 높이 2m , 폭 2m로 규모는 작으나 축조 방식이 전국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구조 양식을 취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마무리
두 다리 모두 편마암질의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들었는데 편마암질의 판석을 불규칙하게 세로로 세워 배 열했으나 외부는 어느 정도 일정하게 쌓았을 뿐 내부는 돌이 일정하지 않아 불규칙한 홍예를 이루고 있다. 편마암 자연 석재를 사용하여 홍교를 놓은 것은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드문 특이한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