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전라도 지역의 마한 문화재 역사 총정리, 전라남도 함평 마한 문화재 안내

함평군 마한 문화재는 마을유적과 분묘유적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마한 시기의 주요 유적은 함평군을 대표하는 함평천과 고막원천을 배경으로 주로 확인되었다. 마한 태동기인 기원전 자료는 고막원천 수계에 자리한 함평 초포리유적과 함평 상곡리유적이 대표적이다. 적석목관묘와 석관묘에서 상당량의 청동제 유물과 중국제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마한 성립의 출자가 중국 대륙으로부터 한반도 중서부지역으로의 관계 속에서 살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유적 모두 긴급수습 발굴조사되거나 소규모로 발굴조사된 경우이다. 때문에 조사 면적이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경향이 있다. 또한 지방문화재나 국가 사적으로 지정받지도 못한 채 희소한 유물 중심으로 관심이 집중되어 유적의 추후 보존방안이나 관리대책이 강구되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영산강유역에서 마한 태동기의 자료가 이렇듯 화려하게 확인된 곳이 드물기 때문이다. 최근 화순 대곡리나 나주 구기촌유적이 조사된 경우가 있을 뿐이다.


함평지역에 산재한 마한 문화재

함평군 마한 문화재에서 가장 으뜸으로 내세울 수 있는 고고 자료는 고분자료가 아닌가 싶다. 앞서 언급한 마한 태동기부터의 분묘 자료에 이어 고분 출현과 함께 다양한 분형의 고분이 지역사회에 남아있는 곳이 함평 관내이기 때문이다. 마한 전통의 제형(梯形)고분부터 뒤를 잇는 방형(方形) 고분과 고총 그리고 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과 원형(圓形) 고분 등 다양한 분형의 고분들이 관내 곳곳에 남아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의 경우는 3개 유적이 관내에 위치한다. 이에 대한 중장기적인 보존 활용 대책이 수립되어야 한다.

함평 중랑유적

함평 중랑유적은 함평군 함평읍 진양리 중랑마을 일원에 위치하는데, 지금의 서해안고속도로 함평IC가 자리한 곳이다. 고갯길이 있는 능선에 걸쳐 마한 시기의 마을이 형성된 유적이다. 능선 남쪽으로는 함평천이 조망되며, 북서쪽으로는 함평만이 펼쳐져 있어 지리적으로 사람이 모여 살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중랑유적에서 조사된 주거지의 수는 205기에 이른다.

함평 중랑유적지
함평 중랑유적지

고분은 산 능선에 조성되었는데, 제형 고분은 고갯마루 서쪽 능선에 자리하고 방형 고분은 동쪽 능선에 축조하였다. 반면 주거지는 주로 강과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경사면에 자리하였다. 주거지 205기 가운데 청동기시대 송국리식주거지 3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한 시기의방형 주거지이다. 방형 주거지는 한 변의 길이와 너비 비율이 1:1.2를 기준할 시 정방형과 장방형으로 양분할 수 있다. 주거지 평균 면적은 15.99㎡인데, 가장 많은 수가 확인된 면적은 10∼15㎡이다. 한편, 26호와 74호, 101호는 33∼48㎡ 규모로 평균보다 두 배 이상 큰 규모였다. 시기적으로 늦은 단계의 주거지들이다. 주거지에서는 일상생활에 사용되었던 토기류가 주로 출토되었다. 노 시설에서 음식조리에 사용되는 자비용 기류(煮沸用器類)와 저장용기류로 크게 나뉜다.

자비용기류 가운데 출토율이 가장 높은 것은 발(鉢)과 장란 형토기(長卵形土器)이며, 시루(甑)도 많은 편이다. 음식을 끓이고 찌는 용도로 사용되는 식기류이다. 토기류 가운데 주목된 경우는 38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나팔형연통토제품이다. 부뚜막 신앙에서 사용된 제기(祭器)의 일종으로 마을 구성원들의 직업군을 이해하는데 참고되는 유물이다. 토기류 이외에 유적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은 철기류 출토품이다.

철도자와 철겸의 출토율이 높은데 미니츄어 덩이쇠(鐵鋌)와 철 슬러그가 21기의 주거지에서 출토됨으로써 철제품 가공 생산기술을 보유한 마을 유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94호 주거지에서는 무려 30점 이상의 철제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덩이쇠와 슬러그가 출토된 주거지는 모두 4세기에서 5세기에 운영되었는데, 마을의 번성을 가져왔던 핵심 자원으로 이해된다. 5세기 후반에 들어서 반대편 산 능선에는 한 변의 길이가 30m에 이르는 고분이 축조된다. 고분 분구는 모두 훼손되었으나, 주구에서 상당히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조사 당시 가장 주목을 받은 유물은 원통형토제품이다. 장고 모양에 가까운 원통형토제품은 한쪽 밑이 막혀있거나 중앙에 둥근 구멍이 뚫린형식으로 마한 지역에서 현지화된 형식에 속한다. 고분 주구 네 변의 도랑에서 모두 출토된 정황으로 보아 분구 가장자리에 세워놓은 장식용 토제품으로 판단된다.


함평 예덕리고분·신덕고분

함평 예덕리고분과 신덕고분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면서 유적명이 각각 명명되어 있다. 에덕리고분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월야면 예덕리 산 170-13 일원이다. 흔히 만가촌고분군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예덕리 신덕고분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43호로 지정되어 있고 월야면 예덕리 산 176번지 일원에 자리하고 있다. 예덕리고분군은 그간 세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1994년 1차 그리고 1995년 2차와 3차 조사가 진행되었다.

신덕고분
신덕고분

첫 번째 조사는 1981년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이후, 만가촌고분군 정비복원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이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확보하는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조사 목적은 고분 평면형태와 규모를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고분별로 4지점에 트렌치를 설정하여 진행하였다. 고분 규모에 비해 협소한 트렌치 조사만으로 내용을 밝힐 수 없다는 의견이 개진되어 추가적인 조사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비복원 계획 조정이 불가한 상황에 따라 8호분 주변의 평탄대지에 대한 고분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8호분을 중심으로 한 고분 1기에 대해서 추가 발굴조사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복원 정비될 고분들의 주구를 정비 사업 중에 병행·조사하기로 결정되어 기존에 알려진 9기의 고분과 더불어 새로 확인된 3기에 대한 조사도 진행하게 되었다. 조사결과, 영산강 유역 고분 중에 가장 이른 시기의 추정되는 결과가 도출되어 추가적인 발굴조사의 필요성이 또다시 제기되었다. 따라서 분구가 잘 남아있는 3기의 고분을 정비복원 대상에서 제외하고 새로 확인된 3기를 추가로 포함함으로써 결국은 9기에 대한 정비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도록 조치 하였다.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지 수량은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1995년 발굴조사 결과를 정리하면, 1∼4·6·9호분을 제외한 나머지 고분은 주구와 함께 분구 부분이 발굴조사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앞선 6기의 고분은 주구를 중심으로 한 제한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고분군은 남-북 140m, 동-서 60m의 범위 속에 14기의 고분이 밀집 조성되어 있었다. 분구 길이가 남-북으로 중심축을 두는 북쪽 그룹과 동-서로 중심축을 둔 남쪽 그룹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북쪽 그룹의 3호분이 가장 큰 규모를 보이는데, 길이가 65m에 달한다. 아마도 수평 확장된 분구의 최종 규모가 아닌가 싶다. 고분 평면형태는 주구 조사를 토대로 볼 때, 4가지로 나누어진다. 장제형(長梯形)과 편장제형(偏長梯形), 제형화된 유형, 방형계형(方形係形)이다. 고분 매장시설은 목관묘가 중심이며, 옹관묘는 추가로 매장된 경우에 한정하여 확인되었다. 옹관묘는 전용 옹관을 사용하거나 일상토기를 사용해 완성한 합구식옹관이 일반적이다. 무덤방에 부장된 유물은 선축된 북쪽 그룹의 경우, 발형토기나 원저호, 평저호등이 일반적으로 조합된 반면, 남쪽 그룹은 호 중심으로 부장되는 경향이 확인되었다. 고분은 북쪽 군집에서 남쪽 군집으로 점차 확대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며, 시기는 3세기부터 5세기 전반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함평 초포리유적

 함평 초포리유적은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산 383-4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은 문화재보호법이 강화되지 못했던 1987년 2월 주민에 의해 발견된 후 이틀 뒤 긴급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마을 안길 도로 포장을 위해 인근 밭을 채토하는 과정에서 청동유물 등이 돌덩이와 함께 드러나 일부 청동기는 주민의 손에 의해 수습되었다. 당시 신고 유물은 한국식동검(細形銅劍) 1점을 비롯하여 청동기 14점, 숫돌(砥石) 2점, 철제칼(鐵製刀) 1조각이었다.

초포리 유적 출토물품
초포리 유적 출토물품

채토로 인해 이미 1m 가량이 파내어진 무덤 내부는 정리 과정에서 묘광 안에 채움한 석재들과 함께 윤곽선이 노출되었다. 묘광 정리과정에서 처음 출토된 유물은 한국식동검으로 관위에 부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장방형의 묘광에 놓은 관이 고정되도록 바깥쪽으로 채워놓은 돌들이 열을 지으며 노출되었다. 그리고 동벽과 북벽 주변에서 청동거울(銅鏡)과 청동창(銅 ), 청동칼자루장식(銅製劍把頭飾) 등이 출토되었다. 머리의 귀 부분으로 추정되는 남벽 아래에서는 석제구슬(天河石製飾玉) 2점이 나란히 출토되어 시신을 눕힌 방향을 확인하였다. 

묘광의 전체 길이는 257cm, 너비는 92cm이며, 머리 쪽이 좁고 발치 쪽이 넓은 형태로 정리되었다. 묘광과 목관 사이를 돌로 채워 메꾸고 나무 뚜껑 위에도 돌을 채워 마감한 무덤은 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라 한다. 대정 괴정동, 아산 남성리, 화순 대곡리유적 등지에서 확인된 바 있다. 고분 부장유물의 출토 위치는 묘광 내부 바닥 출토품, 묘광과 채움 돌 사이 출토품, 묘광 내부 퇴적토 출토품으로 구분된다. 묘광 바닥에서는 장식석제구슬과 청동칼자루장식, 청동거울 3점인데, 칼과 거울, 구슬이라는 조합을 이룬다. 묘광과 채움 돌 사이 출토품은 청동방울이, 묘광 내부 퇴적토에서는 한국식동검이 출토된 위치로 정리되었다. 한편 주민들이 수습한 청동기류는 할석과 묘광 사이에서 꺼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묘광 위에 덮은 목제뚜껑과 돌을 쌓아 덮은 일종의 봉토와 같은 구조물 사이에 묻은 유물이 떨어진 상태에서 수습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총26점의 유물이 정리되었는데, 주민신고품 16점과 발굴조사 출토품 10점으로 구분되었다.


함평 신흥동유적

함평 신흥동유적은 함평군 학교면 월산리 1257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함평 무지개마을 조성사업과 관련하여 시행한 지표조사를 통해 2008년 처음 보고된 유적이다. 이후, 연차적인 조성사업 추진에 따라, 총 네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귀중한 마한 관련 내용들이 보고되었다. 1차 발굴조사는 2008년 진행되었는데, 고분 7기와 옹관묘, 목관묘 등이 확인되어 마한시기 묘역이 조성된 곳임이 밝혀졌다. 이후 2010년 진행된 2차 발굴조사에서는 고분 7기와 옹관묘 5기, 목관묘 7기가 새롭게 추가 확인되었으며, 3차 발굴조사가 실시된 2013년에는 고분 8기, 옹관묘 2기, 목관묘 5기가 드러났다.

신흥동유적 출토 물품
신흥동유적 출토 물품

이후 2014년 4차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조사 결과 2기의 고분이 추가로 드러났다. 고분은 분구가 거의 삭평되고 주구와 일부 매장시설만이 드러났는데, 고분 평면형태는 사다리꼴(梯形) 일색이었다. 고분은 등고선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중심축을 두었는데, 개방된 부분 경우는 특별한 방향성이 없다. 고분에 안치된 매장시설은 목관묘 중심이며, 옹관묘는 소수에 불과하다. 점토대토기 단계의 목관묘부터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마한의 태동기인 기원전부터 묘역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함평 자풍리 신풍유적

함평 자풍리 신풍유적은 함평군 함평읍 자풍리 599-1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유적 일대는 김방산에서 흘러내린 평지성 구릉대지로 밭으로 개간 경작되고 있었다. 2015년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마한 태동기의 구획된 주구묘가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 지석묘와 송국리형주거지를 비롯해 초기철기시대 토광묘, 주구묘, 소성유구(토기가마), 수혈 등이 어우러진 유적은 영산강으로 유입되는 성남천 발원지에 가깝다. 역시 물을 가까이 두고 형성된 유적이었다. 유적에서 확인된 마한 시기의 주구묘(周溝墓)는 모두 3기이다. 주구묘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으로 등고선과 직교하는 1, 2호와 나란한 3호로 구분된다. 1호는 길이 52.6m, 너비 6.8m 규모이며, 도랑(周溝) 너비는 1.1∼2.4m, 최대 깊이 0.4m이다. 

지풍리 신풍유적 추구묘 전경
지풍리 신풍유적 추구묘 전경

주구는 장축방향으로만 확인되며, 너비 부분에는 굴착된 주구 흔적이 없다. 주구 내부에서는 두형토기(豆形土器), 대부토기(臺附土器), 뚜껑, 석도(石刀) 등이 출토되었다. 2호는 길이 30m, 너비 5.5m의 규모로 조성되었는데, 네 변 모두에 주구를 갖추었다. 주구 너비는 1.2∼1.9m이며 최대깊이는 0.5m이 다. 주구 내부에서는 발형토기(鉢), 두형토기(豆形土器) 그리고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편 등이 출토되었다. 등고선과 나란한 방향으로 조성된 3호는 길이 21m, 너비 약 7m이며, 주구 너비는 1.4m, 최대 깊이는 0.2m이다.출토유물은 없다.


함평 상곡리 유적

함평 상곡리 유적은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114-4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2016년 국비지원 사업 대상인 함평 상곡리 주택신축부지 건설과 관련해 실시된 소규모 발굴조사 과정에서 기원전 4∼3세기 것으로 판단되는 석관묘가 확인되었다. 유적지는 영산강으로 유입되는 고막원천이 조망되는 구릉성 대지에 자리한다. 고막원천 수계에서 확인된 초포리 유적과도 직선거리로 2.3km 정도 이격되어 있어, 이 일대의 청동기 문화 형성 배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석관묘는 모두 7기가 조사되었는데, 4기는 초기철기시대에 것으로 보고되었다. 1호로 명명된 유구에서는 중국 동북지방 제작기술을 이어받아 현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형동기(鏡形銅器) 4점이 출토되었다. 경형동기는 청동기시대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유행한 청동으로 만든 거울 모양의 장식제품인데, 주로 몸앞에 매달아 반사되는 빛을 이용할 때 사용된 주술(呪術) 도구이다. 묘는 평면 ‘ㅍ’자형의 석관(石棺)을 마련하였으며, 남쪽 벽석 바깥으로 판석(板石) 3매를 보강한 구조이다. 바닥 전면에 돌(割石)을 깔았는데, 북쪽으로약간 치우친 지점에서 경형동기가 출토된 것이다. 


함평 금산리고분

함평 금산리고분은 함평군 대동면 금산리 산 84-2번지에 위치한다. 고분은 1994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고분은 능선 상에 축조되었는데, 동쪽으로는 함평천이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는 함평만이 관망되는 최고의 경관을 갖추었다. 서쪽으로 700m 정도 이격된 지점에 함평 죽암리고분(장고산 전방후원형분)이 자리한다.

금산리 고분
금산리 고분

고분은 절두방대형(截頭方臺形)으로, 밑변의 길이가 45m에 이른 것으로 지표조사에서는 보고된 바 있다. 2014년 1차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이후 2019년 2차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발굴조사가 현재 진행형인 유적이다. 1차 발굴조사는 시굴조사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그 결과, 고분 규모는 길이 51m, 최대 높이 9m에 이르는 초대형 고총고분임이 밝혀졌다. 분구 외면에는 전면에 걸쳐 즙석시설을 의도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주구 형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즙석된 분구에서는 상당량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즙석시설에 사용된 석재는 크기에 따라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큰 돌들이 아래쪽에서 주로 확인되었다.

고분 축조는 능선을 부분적으로 조정 정리한 후 경사 아래 부분을 높게 성토함으로써 고대화(高大化)된 가시효과를 최대한 주고자 하였다. 분구 정리와 트렌치 조사과정에서 와형토제품(瓦形土製品)과 원통형토제품(圓筒形土製品) 그리고 개배(蓋杯), 중국제자기(中國製磁器), 형상식륜(形象埴輪) 등이 주로 출토되었다. 와형토제품은 평기와 형태로 제작된 토제품으로 한쪽 외면에 파수가 하나 부착된 형식이다. 주로 6세기 전후에 축조된 영산강유역 고총고분 자료에서 출토되고 있다.


함평 마산리 표산유적

함평 마산리 표산유적은 함평군 학교면 마산리 735번지 일원에 위치한다. 동함평 일반산업단지 조성사업으로 진행된 구제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전모가 드러났다. 유적은 마산리고분군과도 이어지는 유적으로 마한 시기 최대 마을 유적 중 하 나로 평가되나, 산업단지 조성으로 인해 표산유적은 보존부분 없이모두 사라졌다. 2013년에서 2014년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 마한시기 주거지 343기와 환구시설 그리고 고분 75기, 우물지 1개소 등 다양한 종류의 유구들이 8백년 이상 지속된 세월 속에서 만들어진 사실이 밝혀졌다.

마산리 분묘 구역
마산리 분묘 구역

마한 태동기인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해서는 문헌기록에 등장하는‘소도(蘇塗)’와 같은 환구시설이 산 정상에 구축되었다. 4중 내외로 둘러진 다중환구(多重還溝) 안쪽 공간에는 솟대를 중앙에 세우고 광장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광장 규모는 직경 40m 정도이다. 환구 바깥쪽 산 아래로는 주거지를 만들어 일반 마을을 조성하고 무덤은 옆으로 흘러내린 산 구릉에 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