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생선회와 사시미의 차이 구별방법 총정리, 생선회의 유래 역사

생선회를 일본말로는 사시미(刺し身)라고 한다. 생선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는 뜻이 아니라 몸을 찌른다는 뜻으로 생선을 잘랐다는 의미라면 기리미(切り身)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이다. 여러 가지 어원설이 있지만 일본의 무사들인 사무라이들이 기리미라는 단어를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사무라이가 활약하던 시대는 이합집산과 하극상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배신과 음모의 세상이었다. 

때문에 사무라이들은 뒤에서 몰래 칼로 등을 베거나 자른다는 뜻의 우라기루(裏切る)라는 말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배신한다는 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라기루를 연상시켜 어감이 좋지 않은 베어 자른다라는 기리미 대신, 찌르다라는 뜻의 사시미를 쓰게 됐다고, 일본어 어원유래사전에 나오는 설명이다. 사무라이 시대에 생선회가 유행했다는 이야기 속에는 의외의 사실이 숨어 있다. 생선회의 역사가 종주국이라고 알려진 일본이 가장 짧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생선회, 사시미는 스시라는 생선초밥과 함께 세계적으로 알려진 일본 음식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생선회의 원조를 일본이라고 여기고 일본은 옛날부터 생선회 문화가 발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1. 생선회의 원조는 어디일까?

생선을 날로 먹는 식습관은 중국이 훨씬 오래 됐다. 지금 중국 사람은 생선을 날로 먹지 않지만 고대 중국인들은 회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다. 고기를 날로 먹는다는 뜻인 회(膾)라는 한자 자체가 중국에서 생긴 글자이다. 고대 중국에서 회는 상류사회의 고급 음식이다. 기원전 7세기 때의 시경에 이미 생선회에 대한 노래가 나온다. 논어에서 공자는 아예 장이 없으면 회를 먹지 않는다고 했다. 맹자에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는 말이 나오는데 날고기와 구운 고기처럼 사람 입에 자주 들어가는 음식이라는 뜻이니 맹자가 살았던 시절에도 회를 그만큼 많이 먹었다는 증거가 되겠다. 물론 여기서 회는 정확하게는 생선회가 아닌 육회를 가리키지만 맹자에는 생선회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자주 보인다.

중국역사를 보면 생선회를 좋아한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다. 중국의 삼국시대가 끝난 후인 진나라 때 사람 장한은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고향의 농어회가 생각난다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버렸다.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뜻의 순로지사(蓴㫲之思)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비롯됐다. 삼국지에 나오는 진등이라는 인물도 생선회 매니아였다. 진등은 조조와 동향 사람으로 유비에게서 서주태수 자리를 물려받았던 사람이다. 소설 삼국지에는 나오지 않지만 역사책에는 생선회를 너무 먹어 기생충 때문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한서 화타열전에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패한 수양제 역시 생선회를 좋아했다.

옛날 중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생선회가 금제옥회(金㡙玉膾)라는 생선인데 옥회는 바로 농어회를 나타내는 말이고, 금제는 귤껍질로 만든 양념장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생선회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고대로부터 생선회를 즐겼던 중국이지만 생선회가 가장 유행했던 시기는 당나라부터 송나라 때가 아닌가 싶다. 당송 팔대가라는 문장가들의 시에 생선회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태백은 생선회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다고 했고 왕유(王維)라는 시인 역시 시녀가 들고 있는 금 쟁반에 잉어회가 놓여 있다고 읊었으며 백거이(白居易)도 아침 밥상에 붉은 잉어회 한 접시가 놓여있다고 했다.

원나라 때도 생선회를 먹었다. 원나라 황제의 요리책(飮膳正要)에도 생선회와 양념 만드는 방법이 실려 있다. 이렇게 회를 좋아했던 중국인인데 어느 날 갑자기 중국에서 생선회가 사라지게 된다.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중국 문헌에서도 생선회에 대한 기록이 홀연히 사라졌지만 우리 기록에서 중국 사람들이 생선회를 먹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선조 때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중국인은 회를 먹지 않는다면서 조선 사람이 생선회 먹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광해군 때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도 임진왜란 당시 원군으로 온 명나라 병사들이 조선인이 생선회를 먹는 것을 보고 오랑캐의 습관이라며 비웃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서는 생선회를 먹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중국 문헌을 봐도 원나라 때는 생선회 기록이 보이지만 명나라, 청나라 때는 생선회와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다. 생선회가 사라진 원인으로 여러 가지 이유를 꼽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전염병 때문이다. 원인을 생선회로 보았기 때문에 생선회가 사라졌지만 명나라 때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 중국인이 생선회를 먹지 않게 된 이유는 아직까지 중국 음식 문화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 생선회를 즐긴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역사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생선회를 즐기는 민족은 우리 한국인이다. 일본에서 사시미라는 단어가 처음 쓰였을 무렵인 조선 초기, 우리나라 선비들은 이미 생선회를 주제로 수많은 시를 남겼다. 생선회 기록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수 없이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고려 중기인 13세기 초의 재상이자 시인이었던 이규보가 남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생선회에 관한 기록이 여러 편 실려 있다. 이외에도 생선회를 주제로 한 시가 다수가 있는데 고려 중엽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회를 많이 먹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생선회인 ‘사시미’라는 단어가 문헌에 처음 나온 때가 1399년이니까 동국이상국집에 실린 이규보의 시는 일본보다 적어도 150년 이상 빠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선회를 다룬 문장은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까지 끝없이 이어지는데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소개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급기야 숙종 때의 실학자 홍만선은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회를 먹고 소화가 되지 않을 때는 생강즙 한 되를 먹으면 바로 소화가 된다고 치료법까지 적어 놓았다. 뒤집어 보면 사람들이 체할 정도로 회를 많이 먹었다는 증거가 된다. 조선시대에 먹은 생선회는 바닷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내륙으로 운송하기 어려웠던 만큼 아무래도 민물고기가 중심이었다. 

자연환경이 오염 되지 않았으니 민물 생선을 그대로 회로 먹어도 별 문제가 없었다. 때문에 옛날 문헌을 찾아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잉어회지만 또 농어회, 은어회도 많이 보인다. 문어회 쏘가리회 홍어회도 보이는데 조개로도 회를 쳤는지 연행일기의 저자 김창업은 맛이 대단히 좋다고 적어 놓았고 조의제문을 써 무오사화를 일으킨 김종직은 고래 고기 회도 실컷 먹었다고 했으니 당시에도 나름 횟감이 풍부했다. 한국 사람이 생선회를 좋아하는 이유는 일본의 영향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 온 식습관 이며 음식문화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생선회 중에서도 잉어회를 으뜸으로 여겼다. 중국이 여름 농어회를 천하의 별미로 여겼던 반면에 우리는 겨울 잉어회를 최고였다. 잉어회는 평민들뿐만 아니라 양반들도 좋아했고 궁중에서도 즐겨 먹었는데 특히 겨울에 잉어를 잡아서 그 회로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을 효도의 상징으로 여겼다. 많은 문헌에 효자와 겨울 잉어 이야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13년에 강릉에 사는 효자 형제가 늙고 병든 어머니가 한 겨울에 잉어회를 맛보고 싶다고 하자 강가로 달려가 얼음을 깨고 잉어를 찾았더니 갑자기 잉어 한 마리가 뛰어 올라와 어머니께 회를 떠서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는 기록이 있다. 잉어회는 이렇게 효도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도 즐겨 먹었으니 조선에서 잉어회가 으뜸가는 대접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생선회와 사시미의 차이

그러고 보면 우리의 생선회 문화와 일본의 사시미 문화에는 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같은 횟감이라도 우리는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를 잡아 즉석에서 회를 쳐서 먹는 활어회를 좋아하는 반면에 일본의 사시미는 생선을 잡은 후에 약간 시간이 흘러 숙성된 맛을 최고로 여긴다.또 우리는 회를 먹을 때도 씹히는 맛을 강조하는 반면에 일본은 혀에 느껴지는 맛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고, 우리는 흰 살 생선을 즐기는 대신 일본은 붉은 살 생선을 더 좋아한다. 한국과 일본의 입맛 차이에서 오는 특징일 수도 있고 혹은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 온 음식문화로 인한 차이일 수도 있지만 한국의 생선회와 일본 사시미 문화의 차이가 발달한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고 보면 고려와 조선시대 문헌에도 지금 우리가 생선회를 먹는 습성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의 서거정은 잠방이 차림으로 물에 들어가 그물을 올려 물고기를 잡은 후 그 자리에서 비늘을 떼어 회를 친다고 했고 고려 중기의 이규보 역시 여울에서 생선을 잡아 바로 회를 치는 것으로 묘사했으니 활어 회를 좋아하는 식습관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생선회 사시미
생선회 사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