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명량대첩 전승지 울돌목 소용돌이는 왜 일어날까? 울돌목의 유래와 소용돌이의 비밀

들어가며

울돌목의 소용돌이는 단순한 바닷물의 흐름이 아니라, 지형과 조류, 수압이 만들어낸 자연의 역학적 현상으로 울돌목은 좁은 해협 지형으로 폭이 약 294m로 매우 좁은 해협이에요. 남해에서 밀려오는 해류가 이 좁은 해협을 통과하면서 수압이 급증하고, 유속이 최대 초속 6.5m까지 빨라집니다. 해저에는 수심 20m에서 2m까지 솟은 암초들이 있으며 빠른 물살이 이 암초들과 부딪히면서 와류인 소용돌이가 발생합니다. 


명량대첩의 배경과 명언

명량대첩은 1597년 정유재란 중에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의 조선 수군으로 130여 척의 일본 함대를 물리친 역사적 해전으로 알려져있죠.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한 후,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지만 전선은 13척뿐이었어요.

 전라남도 진도 대교를 건너는 아래가 울돌목 이며, 조류가 빠르고 좁은 해협으로 전략적 요충지였어요.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의 급류를 이용해 일본군의 진형을 붕괴시키고, 화포와 기동력으로 적을 격파했어요. 그것도 일본군 31척 격침, 조선군은 2명 전사라는 압도적 승리를 거둔곳으로 유명합니다.

 이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은 해상의 제해권을 회복했고, 일본군의 서진을 저지함으로써 전쟁의 흐름을 바꿨으며 아주 유명한 명언이 탄생합니다.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라는 장계는 지금도 국민적 명언으로 남아 있으며 명량대첩은 한국 역사상 가장 극적인 반전 승리로 평가받으며, 영화 명량으로도 재조명되었습니다.


울돌목의 소용돌이는 왜 일어날까?

옛날부터 독일의 라인강변에 있는 로렐라이(Loreley) 언덕에는 하나의 전설이 전해오는데, 고요한 라인 강의 로렐라이 언덕 바위 위에 어여쁜 처녀가 고운 머리를 빗으면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오고가는 뱃사공들을 유혹해 바위에 부딪혀 조난시킨다는 것이었다.

울돌목 소용돌이
울돌목 소용돌이

 그러나 이 이야기는 과학적으로는 신빙성이 없는 전설로 사실은 이 강의 바닥 지형이 험해서 물살이 워낙 빠르고 수로에는 구불구불한 협곡이 많아서 여기에 부딪힌 물살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암초도 많아서 소용돌이에 휩쓸린 소형 선박들이 좌초하기 쉬웠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강이나 바다의 소용돌이(Eddy)는 조류 또는 해류 등의 물살과 지형이 원인이다'고 지적한다. 즉, 빠르게 흐르는 물의 흐름이 구불구불하게 돌출된 지형을 지나가게 되면 굽은 지형에서 더욱 유속이 빨라지고, 강벽에 부딪히면서 회전에너지가 강해져 갑자기 소용돌이로 변할 수 있고 이 소용돌이 물살은 본류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스스로 회전한다는 설명이다.

 소용돌이는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는데 소용돌이 관광으로 유명한 일본 나루토의 경우, 이곳의 해저 바닥의 독특한 좁은 폭 주변에서 세토 내해와 태평양 사이의 많은 양의 바닷물이 밀물과 썰물로 교차할 때,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는 통상 하루에 두 번 오전과 오후에 1∼2시간 정도 소용돌이 물살이 관찰된다. 전문가들은 “이런 유형의 소용돌이는 조수의 차와 계절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르다”고 말한다. 국립해양연구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전남 해남군 진도대교 근처에 있는 울둘목의 경우는 해수의 침식작용으로 인해 지형의 굴곡이 심하고, 응회암의 노두가 잘 발달돼 있는 데다가 해저의 경사도가 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남군 우수영의 해저 경사도가 심하고 암반층의 돌출 부분이 많아 소용돌이가 생긴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좁은 해협을 빠져나가는 빠른 조류가 경사가 심한 해저 지형 위에서 암초와 부딪힐 경우, 강하게 역류하면서 소용돌이를 형성할 수 있다.

 해마다 조류가 센 6월에는 이곳에서 진풍경이 벌어진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전남 진도군 진도대교 밑 울둘목 해안가에는 낚시꾼들이 몰려드는데 그들의 낚시도구는 일반적인 릴낚시가 아니라 뜰채다. 목포와 완도의 중간에 위치한 울돌목 해협 30여m 구간 폭이 700m에서 460여m로 좁아지는 이 지역에서 오후 6시 30분쯤 썰물 때가 되면 조류 속도가 최고 11노트로 국내에서 가장 빨라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 좁은 해협으로 강한 물살에 떠밀리듯이 숭어 떼가 몰리게 되는데 빠져나가던 센 조류가 튀어나온 해안의 바위벽에 부딪히면 갑자기 역류하며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때 썰물과 함께 숭어 떼들도 역류하는 에너지에 의해 명량수도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게 되는데 낚시꾼들은 이들을 뜰채로 뜨면 되는 것이다.


명량해전의 성과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이 길목에서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도도 다카토라 그리고 와키자카 야스히루 등 일본 수군의 명장들이 지휘하는 333척의 일본 대함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순조류(順潮流)를 타고 울둘목으로 순항하고 있었다.

 서로를 발견한 두 함대는 곧 치열한 함포 사격과 불화살, 조총 탄이 난무하는 공방전을 벌였다. 양측간에 사상자들이 발생하는 가운데 12척의 조선 수군은 수적 절대 불리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독려로 용기를 잃지 않고 응전했다.

 시간이 흐르고 조류의 방향이 역조류(逆潮流)로 바뀌면서 일본 수군에 큰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선회 각이 큰 일본 전선은 좁은 해협에서 역류에 의한 소용돌이가 발생하자 배를 조종하기 힘들어졌고, 선단의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효과적인 집중공격이 어려워졌다. 이 호기를 놓치지 않은 이순신 장군은 기함에 총공격을 명하는 깃발을 올렸다.

 판옥선의 현측에 장착된 현자총통과 지자총통에선 불을 뿜었고, 불화살들이 허공을 갈랐다. 몇 시간 후, 전투가 끝나자, 불리한 전력을 지형지물로 극복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위대한 승리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