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대왕은 개혁과 문화 발전에 힘쓴 군주였으며 학문을 중시하여 실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문물제도를 정비하며 조선 후기 문화 부흥을 이끌려고 했죠. 그의 통치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평가되는데요. 오늘은 정조대왕의 업적 중 한가지인 수원화성 축성과 관련되어 백성들을 위하는 위민정신과 창원 유씨 부인에 얽힌 숨은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고민한 정조대왕의 위민정신
정조는 팔달산 아래 새롭게 조성된 읍치에서 농업을 활성화하여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자 하였죠. 척박한 토질을 바꾸기 위해 백성들에게 퇴비 증산을 지시하는 한편 성문 밖에 만석거를 만들고, 그 주위에 대유둔 이라는 국영농장을 조성한 사실이 그것이죠. 백성들은 이 땅을 임대받아 수확량의 50%는 세금으로 내고 50%는 자신들이 갖게 되었으며 이건 그 당시 획기적인 시스템이죠.
내탕금으로 소 10마리를 사들여 둔전 경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수원화성 축성 공사에 부렸던 소 32마리도 둔전 백성들에게 주어 모두 42마리로 농사를 짓게 한 기록을 수원화성 박물관에서 살펴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논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이름, 경작하는 땅 크기 등 모든 내용을 기록한 토지대장을 만들어 둔전 관리자들의 횡포를 견제하는 장치로 삼았으며 이러한 정조의 깊은 관심으로 대유둔 일대의 농사는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이 모두 문서로 존재한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문서의 힘이죠.
수원화성 축성 공사를 위해 수고하는 장인들을 위한 배려
공사 기간동안 정조는 감독관과 여러 장인들에게 여름과 겨울에 더위와 추위를 막을 물품을 내려 주었는데요. 척서단은 더위 먹은 사람이나 더위에 몸이 쇠약해진 사람을 치료하는 환약으로 정조는 1794년 6월 25일에 척서단 4천 정을 장인들에게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요.
1795년 11월에는 장차 닥쳐올 추위에 대비해서 털모자와 무명을 준비해 장인 한 사람당 모자 하나에 무명 1필씩을 나눠 주고, 정조는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음식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요. 정조가 수원화성에 행차할 때 해가 바뀌어 공사를 새로 시작할 때, 여름 무더울때 또는 공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음식을 내렸는데 모두 11차례 이루어졌습니다.
1794년 9월에는 장인과 일꾼 한사람에게 흰떡 두 가래에 수육 한 근, 술 한 그릇이 돌아가도록 했고, 보통 때는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 생선 자반 두 마리씩을 내렸다. 따로 특별한 상을 내리기도 했는데, 1795년 모친의 회갑연 때 공로에 따라 차등을 두어 장인들에게 무명, 베, 쌀을 상으로 하사하였습니다. 수원화성이 단순히 성이 아니라 그 설계, 공사과정, 인부들에게 조차도 많은 배려를 했다는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위민정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백성들과 함께 나누는 모친의 회갑연
정조는 1795년 모친의 회갑연 다음날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행사를 진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요. 화성부에 사는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소년소녀가장) 539명과 가난한 백성 4,813명에게 쌀과 소금을 나눠주고 죽을 쑤어 먹였으며 음식물이 분배되는 동안 정조는 신풍루에 올라가 이를 지켜보았고 백성들에게 나눠줄 죽을 직접 맛보는 등 관심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실제 복원된 수원 화성행궁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으며 낙남헌에서는 70세 이상 관리와 80세 이상 서민 노인 384명, 회갑을 맞은 노인 171명을 불러 성대한 양로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해지고 정조는 잔치에 참여한 노인들에게 비단과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를 상으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어른에 대한 공경과 부모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배푼 성군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백성들의 근심을 더어주려는 정조의 마음
정조는 원행을 통해 직접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려고 하였는데요. 우리 사극에 보면 임금이 궁궐을 나와서 돌아다니는 장면을 상상하시면 될듯합니다. 원행 때마다 상언(백성들이 임금을 직접만나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것)이나 격쟁(징을 치고 나와서 호소하는 것)을 듣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는데, 능행 중에 진행된 상언이 3.232건, 격쟁이 123건이나 되었다고 하며 백성을 소리를 다 들어주려고 노력한 성군이 있다는것 자체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진건 아닌지 생각됩니다. 이때 숨은 이야기가 있죠. 1795년 원행 때 경사도 창원의 유씨 부인이 격쟁하여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호자 정조는 환도 후 안핵사를 파견하여 일을 바로잡도록 하교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상도 창원의 유씨 부인 격쟁 사연 숨은이야기
경상도 창원의 유씨 부인의 남편은 정준이라는 선비였는데요 당시 창원 부사 이여절이 구실을 붙여 마을 사람들을 잡아다가 규정보다 과한 형벌과 고문을 가해 30여 명이 죽는 일이 벌어졌죠. 이를 고발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집을 헐어버린 후 마을 밖으로 내쫓기도 하면서 악행을 일삼앗는데요.
정준이 이여절의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자 이여절은 정준에게 조사 업무를 시킨 후 결과에 문제가 있다고 트집을 잡아 심하게 매질하여 감옥에서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간악한 짓을 하게되죠. 예나 지금이나 악한 사람은 간교한 꾀를 부려 사람을 못살게 하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유씨 부인의 격쟁 이후 파견되었던 안핵사가 진상을 보고하자 정조는 크게 노하여 이여절은 물론, 이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경사도 관찰사도 잡아들여,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잘못을 조사한 뒤 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지시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요. 정조는 궁궐에서 저 멀리까지 백성들의 안위를 살피려고 노력하는 성군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무리
이 외에도 정조대왕은 규장각 설치, 탕평책 추진, 장용영 창설, 수원 화성 건설, 금난전권 폐지, 신해통공 실시, 문체반정 등의 정책을 통해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그 생에 대해서도 독살설 등이 분분합니다.
| 축성공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