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쟁탈전 한강유역, 아차산성에 얽힌 이야기, 아차산 보루성

서론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 호텔에서 구리 쪽으로 자동차로 5분 정도만 달리면 왼쪽으로 우람한 산이 하나 보인다. 바로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해발 285m의 아차산으로 빼어난 입지를 자랑하는 이 산은 예로부터 군사 주둔지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런 사실을 입증하듯 산 곳곳에는 군사유적지가남아있다. 아차산은 구리시 서쪽과 서울시 동쪽의 경계로, 일반적으로 서쪽의 용마봉과 북쪽의 봉화산 등 주변의 봉우리를 포함하는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동쪽으로는 중랑천, 서쪽으로는 왕숙천을 따라 남북방향의 교통로가 개설되어 있다. 아차산은 인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여서 남쪽으로는 한강이남 지역이 한눈에 조망되고, 북쪽으로는 멀리 의정부에 이르는 길목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아차산 일대에는 소규모 군사 방어요새인 보루유적이 모두 17개소가 존재하고 있다. 보루유적은 남한 내에 존재하는 고구려 관련 유적 중 가장 밀집된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정세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차산 유적 지도
아차산 유적 지도

아차산 보루 유적

아차산 1보루는 구리시 아천동 산 49-1번지와 서울 광진구 중곡동 산 2-1번지와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아차산의 주능선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가다가 돌출된 아차산의 해발 250m 봉우리에 위치하며, 아차산 보루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아차산성에서 약 700m 북쪽에 해당하며, 아차산 공원에서 아차산 주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등산로의 첫 평탄지이다. 아차산 1보루의 전체둘레는 103m이고, 평면형태는 장타원형이다. 유적의 규모는 상부를 기준으로 장축은 약 50m, 단축은 38m 내외이다. 토루의 높이는 안쪽 약 1.5m이고 하단부의 폭은 약 6m가량이다. 토루의 외곽 일부 구간에서 3~4단 정도의 석축이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석축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동쪽으로 난 등산로에서 성벽의 흔적이 확인되는데, 등산로는 유적 외곽의 일부분을 삭토하면서 형성되었다. 등산로와 인접한 부분에 성벽으로 보이는 석축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

아차산 2보루는 구리시 아천동 산 54-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차산 주능선에 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간 능선이 돌출하며 형성된 봉우리(해발 276.2m) 일대에 해당된다. 1보루에서 북동쪽으로 460m, 제3보루에서 남동쪽으로 180m 거리에 있다. 유적은 작은 봉우리 정상부를 돌아가며 쌓은 석축부와 그 안쪽의 흙으로 이루어진 평지로 나누어진다. 보루의 둘레는 약 40m이며, 보루의 남서쪽에는 치로 보이는 시설물이 있는데 윗부분에는 근래 조성된 돌탑이 있다.

아차산 3보루는 구리시 아천동 산 49-1번지와 서울 광진구 중곡동 산 1번지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아차산 주능선상에 돌출된 작은 봉우리(해발 296m) 이다. 유적 동쪽으로 한강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며, 그 너머로 암사동 선사주거지, 남한산성, 검단산 일대의 조망이 매우 좋으며, 서쪽으로 중랑천 너머 남산 서울타워가 보여 주변 지역을 감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보루의 정상부는 평탄하고, 동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지만 서쪽은 급경사를 이룬다. 아차산 3보루의 둘레는 304m 정도이며, 장축방향은 남북방향으로 평면형태는 긴 타원형이다. 아차산 4개보루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아차산 4보루는 구리시 아천동 산 52-2번지와 광진구 중곡동 산 1번지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아차산 정상(해발 285.8m)부로 용마봉의 주능선과 연결되기전 마지막으로 솟구친 아차산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에 해당한다. 아차산 4보루는 1997년과 1998년에 걸쳐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이 발굴조사는 남한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임을 인식하고 실시한 첫번째 학술발굴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발굴조사를 통해 고구려 방어요새 시설물 확인과 함께 다량의 토기류, 철제류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아차산 보루
아차산 보루

아차산 보루성

아차산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능선 일대에 남아 있는 보루성이다. 보루성은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고구려 성곽이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아차산 제4보루에서는 당시 주둔했던 고구려 군부대의 막사시설로 추정되는 온돌유적과 물을 저장하는 집수정, 고구려의 관직명이 음각돼 있는 명문토기를 비롯한 500여점의 토기류와 투구, 철제갑옷, 마구류등 300여점의철기가발굴되기도했다.


아차산성

아차산성은 아차산의 줄기가 한강변에 이르러 마지막 봉우리를 이루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대부분의 지역이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 산31번지일대에 해당되며, 산성의 북벽 일부 구간과 장대지는 구리시 아천동에 속한다. 광진구에 자리한 워커힐 호텔의 뒤쪽 능선을 따라 오르면 산성에 이르게 된다. 유적의 남동쪽으로 한강의 북안과 이어지고 있으며, 북으로는 의정부에서 서울 북동부로 뻗은 구릉성 산지에 속하고 있다. 산성은 가장 높은 곳이 해발 205.5m로 낮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으나 남동쪽으로는 한강 너머의 평야지대가 조망되어 풍납토성, 몽촌토성, 암사동 백제고분군 등 백제 유적이 한눈에 조망된다. 서쪽으로는 중랑천이 자리하고 있으며, 북으로는 구릉성 산지에 고구려의 보루유적들이 다수 이어지고 있다.



아차산성
아차산성
아차산성
아차산성

산성이 위치한 광장동은 예로부터 나루가 발달하여 한강의 남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문헌에 의하면 백제 원년(286)에 축성되고 396년 고구려가 공취한 성으로 기록되었고, 475년 백제왕이 전사한 곳으로 전해지는 등 삼국이 한강유역을 놓고 벌인 각축전의 중심지에 해당한다. 문헌기록은 광개토대왕비,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에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내려와 북성을 7일만에 빼앗고 남성을 공격하여 성문에 불을 놓자 왕이 달아났다. 이에 고구려 장군걸루, 만년 등이 개로왕을 잡아 얼굴에 세번 침을 뱉고 그 죄를 헤아린 다음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고 전하고 있다. 

아단성이 아차성으로 명칭이 변한 이유는 아단의 조선의 시조 이성계의 이름과 같아 그것을 피하기 위해 후세에 일부러 글자모양이 비슷하게 고쳐써서 아차성이 되었다고 한다. 아차산성은 아차산 능선 끝부분 남쪽지역을 적절히 이용하여 성벽으로 사용하였으며, 성 중앙부를 흐르는 계곡부를 포함하도록 둘러쌓은 포곡식 형태의 석축산성이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1,046m이고 성내부의 면적은 63,810 m²이다. 평면형태는 부정형에 가까운 6각형을 이루고 있다. 가장 높은 곳은 장대지가 있는 산성의 서북단으로 해발 203.4m이고 가장 낮은 곳은 서의 남단으로 해발 122m이다.

성내부는 지대가 높은 장대지부터 가장 낮은 지역까지 평탄면과 경사면이 반복되는 계단상의 지형을 하고 있다. 성벽은 화강암을 다듬어서 쌓아올린 석축 성벽으로 내외벽을 쌓고 외벽 바깥면에 보조석축 형태의 보축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성내부에서는 많은 건물지와 온돌, 배수로, 연지 등이 조사되었다. 또한 많은 양의 유물이 출토되어 산성의 성격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는데 분석결과 현재 남아 있는 석축 성벽은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6세기 중반 이후 한강유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신라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백제에 얽힌 이야기

개로왕의 최후

아차산성은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해 쌓았던 성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대군을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을 공격했습니다. 위기에 처한 개로왕은 아차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에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죠. 이 사건은 한때 강력했던 백제가 국력을 잃고 웅진인 지금의 공주로 수도를 옮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온달 장군의 죽음

개로왕의 죽음과 함께 아차산성에는 또 한 명의 비극적인 인물, 고구려의 온달 장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의 주인공인 온달은,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가 아차산성 부근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온달 장군이 죽은 뒤에도 그의 관이 움직이지 않아 평강공주가 찾아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죽었으니 이제 편히 가시라고 위로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아차산성 안에는 온달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가 깃든 온달샘이 있다고 합니다. 

아차산성의 얽힌 설화

아차산성의 이름에 얽힌 흥미로운 설화도 있습니다. 조선 명종 때의 뛰어난 점쟁이 홍계관의 이야기인데요. 그의 점괘에 심술이 난 명종이 궤짝 속의 쥐가 몇 마리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했습니다. 홍계관은 다섯 마리라고 답했지만, 궤짝 속에는 한 마리밖에 없었죠. 왕은 그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했고, 형리가 홍계관의 목을 베려는 순간 왕이 다시 쥐를 잡아 배를 갈라보니 새끼 두 마리가 더 있었습니다. 즉, 원래의 쥐 한 마리와 배 속의 두 마리를 합쳐 세 마리였던 것인데  놀란 왕은 홍계관을 살리려 급히 신하를 보냈습니다. 신하는 멀리서 형 집행을 멈추라고 소리쳤지만, 형리는 그 신호가 빨리 사형을 집행하라"는 뜻으로 오해하고 말았죠. 결국 홍계관은 목숨을 잃었고, 소식을 들은 왕이 아차! 늦었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해서 고개가 아차고개, 산은 아차산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닌 설화지만, 아차산의 이름에 재미있는 유래를 더해줍니다.


결론

아차산성은 삼국시대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아차산 곳곳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치열하게 다투었던 흔적인 여러 보루들이 남아있습니다. 아차산성 주변을 둘러보며 당시의 역사적 이야기를 떠올리면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아차산성의 성벽 내부는 일반적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아차산 역사문화투어'에 참여하면 해설사와 함께 성벽 안으로 들어가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유적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