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왕릉의 구조와 명칭 총정리, 왕릉 구조 완벽 정리

서론

왕릉은 한 임금의 태평하거나 처절한 역사를 마감하는 공간이다. 또한 새 역사를 이끄는 임금이 자신의 권력을 처음으로 드러내는 출발지이다. 그렇게 보면 왕릉은 한 임금이 이끌어온 시대의 종결 과 후대 임금이 이끄는 새 왕실의 운명이 겹치는 절묘한 공간이다. 우리 민족은 조선 왕릉과 같은 사후 공간을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곳으로 조성해왔다. 선왕은 속세에서의 피곤한 삶을 잊고 편히 쉬는 공간으로, 뒤를 이은 왕은 선왕의 선정을 본받는 공간으로 조영했다.


조선왕릉의 구조와 명칭

조선왕릉 구조와 명칭
조선왕릉 구조와 명칭

곡장曲墻(곡담)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의 동, 서, 북 삼면에 둘러놓은 담장. 봉분의 중심을 드러내주고, 정자각을 향하여 열려 있음을 분명히 제시한다. 곡장의 바깥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을 조성하여 왕릉의 위엄성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능침陵寢(봉분)

능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 능상陵上이라고도 한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둘러 있어 전체가 하나의 왕관처럼 보인다. 봉분의 높이는 6미 터 정도이며, 병풍석에는 시대에 따라 십이지신, 모란, 연화 문양이 새겨 있다. 왕과 왕비의 합장 여부에 따라 단릉, 합장릉, 쌍릉, 삼연릉, 동원이 강릉, 동원상하봉릉 등의 형태가 보이며, 이에 따라 왕릉 전체의 배치 계획이 적용된다.

병풍석屛風石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 밑 부분에 둘러 세운 12개의 돌, 병풍석에는 12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상을 해당 방위에 맞게 양각하였는데, 모든 방위에서 침범하는 부정과 잡귀를 몰아내기 위하여 새겼다. 둘레돌, 호석護石이라고도 한다.

지대석地臺石

병풍석의 면석을 받쳐놓은 기초가 되는 돌. 

난간석欄干石

봉분을 둘러싼 울타리 돌. 

상계上階

능침과 혼유석, 석양, 석호, 망주석, 곡장이 있는 가장 위의 단으로 초계 라고도 한다.

중계中階

문인석과 석마가 있는 중간단.

하계下階

무인석과 석마가 있는 아랫단.

석양石羊

능침 공간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석양과 석호가 일반적으로 네 쌍이 배치되어 있다. 양은 대개 희생의 상징이나 제물로 사용되지만, 석양은 수호의 의미를 지니므로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사악한 것을 피하게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왕릉의 석양은 고개를 숙여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능에 배치되는 동물은 주로 수컷이지만, 서오릉과 서삼릉에는 암컷인 석양이 보인다.

석호石虎

석양과 함께 능침을 수호하는 호랑이 모양의 수호신, 밖을 지켜보는 형태로 설치했다. 능을 수호한다는 상징성은 동일하지만, 각 능마다 꼬리의 위치나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망주석望柱石

봉분의 앞면 좌우에 팔각의 촛대처럼 배치된 석물을 망주석이라고 한다. 혼령이 봉분을 찾는 표지 구실을 한다는 설과 음양의 조화, 풍수 기능을 한다는 등 여러 주장이 있다. 망주석은 능침이 신성구역임을 알리고, 멀리서 능상 부분을 바라볼 때 이곳에 능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보게 하려고 세워둔 것으로 추정된다. 망주석 기둥에는 세호라는 동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망주석을 올라가는 형상 혹은 내려가는 형상으로 새겨 있다.

혼유석魂遊石

일반인의 묘에는 상석이라 하여 제물을 차려놓지만, 왕릉은 정자각에서 제를 올린다. 그래서 혼유석은 혼령이 앉아 쉬는 곳이다. 혼유석은 능의 정면에 놓인 상처럼 생긴 돌로, 원래 명칭은 석상이다. 영혼이 이곳에 나와서 놀라고 설치하는 것이라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창안의 석상이 혼유석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혼유석 아래에는 이를 받쳐 주는 4~5개의 고석이 있다. 둥근 북 모양으로 생겼으며, 도깨비의 얼굴이 새겨 있는데 사악한 잡귀로부터 혼유석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석鼓石

북 모양을 닮은 혼유석의 받침돌로 사악한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귀면을 새겨놓았다.

장명등長明燈

왕릉의 장생발복長生發福을 기원하는 등, 장명등은 석등의 형태로 망주 석보다 한단 아래에 놓인다. 초기에는 장명등의 화창 부분에 기름 등잔을 놓아 묘역을 밝혔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불을 피운 흔적이나 등을 넣은 흔적이 없으므로 점차 형식적인 상징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봉분 앞에 세워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인석文人石

능상 부분은 일반적으로 상·중·하계 3단으로 나뉘는데, 2단에는 문인석 한 쌍이 석마를 대동하고 서있다. 조선시대 백관이 착용하던 복두와 공복을 입고, 자신의 품계를 나타내는 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문·무인석은 장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사람 키보다 훨씬 크게 조각하여 세워두었는데, 후대로 내려올수록 머리 크기가 줄어 사람의 몸에서 차지하는 머리의 비율에 가까워진다. 

무인석武人石

문인석 아래에서 왕을 호위하고 있으며, 두 손으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로 서 있다. 전형적인 무관의 성격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소 큰 얼굴과 목, 굵은 몸, 골격 마디를 강조하며 무관을 표현했다. 영조대를 지나면서 단이 없어지고 문인석과 같은 높이에 배치되는데, 이는 국난을 겪고 난 후 무인의 지위 향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문인석과 무인석은 각각 석마를 데리고 있다. 석마는 고려시대에도 존재 하지 않았으며 중국에도 없는 조선 왕릉의 특징적 요소이다. 

고삐 없이 석인상 뒤나 옆에서 읍을 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말은 시베리아 지역의 대표적인 제물의 하나이며 특히 천신에 바치는 태양을 상징한다. 조선 왕릉에 배치된 석마 역시 계급을 상징한다.

예감瘞坎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석함,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한다. 정자각 뒤 왼쪽에 있다. 

산신석山神石

장례를 치른 후 3년 동안 후토신(땅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정자각 뒤 오른쪽에 있다.

정자각丁字閣

정자각은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다. 왕릉의 중심 건축물로서 그 평면이 한자의 ‘정丁’자와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었다. 정자각에 오를 때는 동쪽으로 오르고 내려올 때는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이를 일러 동입서출이라 한다. 

비각碑閣

비석이나 신도비를 세워둔 곳, 신도비神道碑는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현재 남아 있는 신도비는 태조 건원릉의 신도비와 태종 헌릉의 신도비뿐이다.

참도參道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 박석을 깔아놓았으며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라고 하며, 오른쪽의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라고 한다.

수복방守僕房

능을 지키는 수복이 지내던 곳으로 정자각 오른쪽 앞에 있다.

배위拜位

홍살문 옆 한 평 정도의 땅에 돌을 깔아놓은 곳으로 왕이나 제관이 절을 하는 곳이다. 판위, 어배석, 망릉위라고도 한다.

홍살문紅箭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놓았다. 홍문 또는 홍전문이라고도 한다.

금천교錦川橋

홍살문으로 진입하기 전에 금천교라는 석조물이 있다. 금천교의 ‘금천’ 은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시내라는 뜻으로, 금천교 건너편은 특별한 영역, 즉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홍살문 바깥에 설치되지만 유일하게 효종 영릉에만 금천교가 참도의 중간에 설치되어 있다. 그 이유는 물이 능역을 가로질러 흐르기 때문이다.

재실齋室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음복하고, 망제를 지 내는 곳이다.


결론

훼손이 매우 심각한 능역은 식재나 공원 조성 같은 방법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복원 방법에 대해 고민하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먼저,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에 대한 교육, 전시, 체험을 위한 왕릉 관련 시설이 건립되어야 한다. 조선왕릉에 대한 연구 및 조사를 위한 시설물이 필요하다. 조선 왕조의 전통 장례를 문화 행사로 재현한다면 의미 있는 볼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장례 행렬 도구는 상설 전시하고 상여는 국상에 사용할 수 있는 방안도 생각해봄직 하다. 세번째로 왕릉 부근에 외국인을 비롯한 관광객을 위한 왕릉촌 건립을 건의한다. 조선시대에도 왕릉 제례를 위해 능역 부근의 객사나 행궁 등에서 묵으며 제례를 봉행했다. 능 주변을 전통 가옥의 왕릉촌으로 꾸며 왕의 행차를 재현하고 관광지로 활용하자는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