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지증왕 즉위 이후 시행된 여러 혁신적 시책은 그를 이은 법흥왕이 더욱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신라의 지배질서 전반이 그 전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초월자적 지위로 부상한 국왕의 위상에 걸맞게 제반 제도도 새 롭게 정비되어 나갔다. 그처럼 제도적 뒷받침이 따르지 않으면 새로운 지배체제 의 영속적 유지는 보장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율령의 반포나 불교의 공인 도 그런 배경 아래에 추진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대상은 골품제라는 신분제의 편성이었다.
| 신라 골품제도 |
골품제도의 정비
중앙집권적 귀족국가가 출범함에 따라 자연히 그를 지탱하는 기반인 지배 집단의 근본 성격도 달라졌다. 직전까지의 지배집단은 부체제 하의 공동체성 이 강한 수장적 성격을 지녔다면 이제는 그와 판이한 성격의 귀족관료가 출현 하였다. 물론 아직 관료로서의 성격이 미약한 초기적 모습을 띠었지만 장차의 진행 방향은 이미 설정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흘러가더라도 이 귀족관 료들이 적절히 재생산될 수 있는 제도화가 필요하였다. 그를 위해 마련된 것이 골품제였다. 골품제의 시원을 별다른 조건 없이 따진다면 무한정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제도로서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520년(법흥왕7) 율령을 반포하면서부터 이다.
그 이전에는 간干이라 불린 층이나 그 하위의 실무를 담당한 층으로 크게 나누어진 정도였고 그들의 지위가 대체로 세습되었으므로 신분적 속성을 띤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사회적 위상이 제도적으로 보장받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법흥왕이 반포한 율령 속에 그것이 편목으로 자리 잡았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단순히 관행으로만 승인되어 왔던 특권이 이제 성문법적 제도로서 보장받게 된 것이다.
골품제란?
골품제란 신분제가 정식 출범함으로써 지배집단을 강하게 규정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출발 당초부터 골품제가 완성된 형태였던 것은 아니다. 정치제도가 정비되면서 그에 어울리게 내용도 차 츰 갖추어져 나갔다. 말하자면 골품제는 처음부터 고정불변한 형식과 내용으로 고착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지배체제에 어울리게 정비, 운용되어 갔다.
골품을 흔히 골骨과 두품의 품이 하나로 결합되어 성립한 용어라 이해 해 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뚜렷한 의문점이 제기된다. 두품의 어간은 어디까지 나 ‘두頭’이지 ‘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의 ‘품’은 단순히 ‘두’의 등급을 의미 하는 접미어에 불과하다.
따라서 골품은 골과 두품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용어가 아니라 골품과 두품이 각기 따로 존재하였고 그것이 하나로 결합함으로 써 성립한 것이었다. 이때 ‘두’는 단순히 어떤 ‘머리’를 가리키며, 따라서 거기에 는 수치가 많은 것을 높고 귀하게 여기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이때의 ‘두’가 어떤 ‘머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사람이나 동물의 수치를 나타내는 단위로 사용됨이 일반적이므로 부릴 수 있는 사람 혹은 보유 할 수 있는 동물의 수치를 나타내거나 아니면 한 사람이 그럴 만한 수치를 감 당할 수 있는 능력을 표현한 것이겠다. 두품의 수치가 높을수록 신분이 높아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골품은 두품과 구별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와는 다른 의미를 지녔음이 확실하다. 이때의 골을 둘러싸고 뼈로 해석하는 주장, 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견해 등 논란이 많지만 상대되는 ‘두’와 관련지어 이해함이 적절하다. 그럴 때 골은 ‘두’라는 이른바 머리 속에 든 핵심으로서 골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온당하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겉모양을 의미하는 ‘두’보다는 그 속에 든 핵심적 내용물이라 할 ‘골’이 한층 더 중시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원래 머리에 등급이 매겨진 데서 두품이라는 용어가 나온 것처럼 골에도 따로 등급이 있게 된 데서 골품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골품과 두품이란 용어가 각기 병존하였는데 어느 시점부터 골품으로 통칭되면서 그 제도를 총칭해 골품제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골품은 골의 품을 나타내는 좁은 의미와 두품까지를 아우른 넓은 의미를 동시에 갖는 셈이 된다.
후자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골품의 용법이다. 골품제는 흔히 성골과 진골의 두 등급으로 나뉜 골품과 6등급으로 나뉜 두품 등 전체 8등급으로 구성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법흥왕 7년 율 령을 반포할 때에 이미 그처럼 8등급으로 나뉜 구조가 완성된 상태로 출발하 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최상급의 성골이 진평왕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출현한 데서 명백하다. 따라서 원래 골품제가 제도로서 모습을 갖춘 법흥 왕대에는 골은 오직 하나로서만 존재할 따름이었고, 두품도 그처럼 6등급으로 세분된 상태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두품이 몇 등급이었는지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진평왕대에 이르러 골로부터 성골이 분화되고 그에 따라 기존의 골이 진골로 불리게 되었을 때 더불어 두품도 한층 더 세분됨으로써 전체 8품의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고 짐작된다.
골품제 운영 원리
8품성골이란 용어는 그런 실상을 어렴풋하게나마 반영해 준다. 골품제 운영의 핵심은 골품과 두품의 구별에 있다. 골품과 두품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가로놓여 있었다. 골품은 최상층의 지배집단이 소속 한 신분층을 가리킨다. 그들은 정치 운영을 기본적 특장으로 하면서 모든 특권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 하였으며, 따라서 그것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는 방향으로 운용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골품은 잘 분화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골이 나뉘어 성골이 출현하게 된 것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특수 사정에서 말미암았다.
반면 두품의 분화는 상대적으로 쉽게 이루 어졌다. 골품 집단이 주축이 되어 정치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기존 체제의 골간 을 유지해 가기 위한 방편으로 두품의 분화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쉽게 생겨난 하위의 두품은 그만큼 쉽게 소멸될 성질을 지니기도 하였다. 성골이 골로부터 상향 분화되어 출현하였던 만큼 쉽게 소멸될 성질을 지녔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골품제가 제도화되기 이전 지배집단은 크게 간층과 비간층의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간층 집단이 신라사회 전반의 정치적 운영을 담당하였 다면 비간층은 그 아래에서 구체적 실무 행정을 분담하였다. 각자가 맡은 역할 은 전문성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자연 세습되어 갔을 터이다. 그런데 중앙집 권적 지배체제가 갖추어져 가면서 간층 사이에서도, 그리고 비간층 사이에도 역할에 따라 차츰 구획이 생겨나고 저절로 우열에 따른 등급이 매겨졌다. 간층 내부에서 계선이 생겨나 하나의 뚜렷한 층위가 지워졌다면 비간층 내에서도 역시 층위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간층 집단 가운데 최고 상층은 자신들만의 특권을 유지해 가기 위해서 원래 동일한 간군 집단 출신이었으면서도 계선의 간극을 엄격히 적용함 으로써 그를 뛰어넘을 수 없도록 고착화시켰다.
여기서 사실상 상층부인 간들 가운데도 ‘골’과 ‘두’ 사이에 하나의 뚜렷한 계선이 그어졌다. 최상층 집단이 가장 신경 써서 운용하려 한 것은 바로 간층 내부에서 그어진 계선이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간층 하위와 비간층 상위 사이의 계선도 엄격하게 유지·관리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골품제는 골품과 두품 사이의 계선, 그리고 두품 가운데 원래 간층과 비간층 사이에 경계가 그어져 크게 3분 된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계선들은 시기가 내려오면서 넘나들 수 없도록 엄격히 규정하였다. 그것이 신분질서의 유지를 뛰어넘어 골품제 중심의 신라 지배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마무리
골품제는 구조적으로 크게 3등급을 기본 축으로 해서 운영된 신분체계라 하겠다. 골품제 운용상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왕경인을 대상으로 한 신분제였다는 사실을 손꼽을 수 있다. 지방민은 골품제의 신분질서 바깥에 배치된 골품 외적인 존재로 취급되었고, 그에 따라 그들만을 대상으로 삼은 신분체계가 따로 마련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골품제는 신라의 모태였던 사로국의 지배자층을 중심으로 한 승자의 신분체계라고 할 수 있다. 왕경지배자 공동체를 유지해 가는 기본적 수단이 골품제였던 셈이다. 그런 실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관등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