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라를 새로운 국가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호기로운 선언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인재가 절실하였다. 이제 갓 출범한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기존 부체제적 성격이 강한 인물들은 걸림돌일 뿐이었다. 목숨을 바쳐 충성 해야 할 근본 대상이 6부나 그 부장이 아니라 신라국가와 국왕으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국왕은 이들을 기반으로 왕도정치를 구현해 내려고 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율령은 그를 위해 마련한 제도적 장치였다.
인재양성을 위한 화랑도 창설에 담긴 의미
국왕권은 물론 지배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해가기 위해 항상적 기구가 필요하였다. 또 그를 운영하려면 이를 제대로 감당할 관료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병부나 상대등 등 정치적, 군사적으로 긴요한 대상을 중심으로 제도적 정비가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그런 기구를 정상적으로 담당 할 수 있는 인력들이었다. 기존 공동체성에 기반을 둔 성격의 인물들로써는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이제 새로운 성격의 인재상이 필요한 시대를 맞아가고 있었다. 직전의 부체제 아래에서는 독자성을 지닌 부를 기본 단위로 해서 각기 필요한 나름의 인재를 육성, 선발하는 방식을 갖고 있었다. 오랜 전통적인 공동 체 운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제 6부가 소멸된 마당이었으므로 그를 벗어나 새로운 조직과 지향을 지닌 성격의 인재를 길러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위 해 시도된 것이 바로 원화제였다. 원화제는 복수의 여성을 상징으로 내세워 그들을 중심으로 젊은 지원자를 불러 모아 조직한 것이 특색이었다. 새로운 성격의 인재를 양성하려는 노력은 지소태후가 섭정하면서 먼저 시작되었다. 원화(源花)라는 젊고 예쁜 여성을 앞세워 미성년의 어린 남자아이 수백 명을 불러 모아 이들을 교육하고 훈련해서 인재로 기르는 방식이었다. 국가에서는 그들 가운데 적절한 인물들을 관료나 군관 등으로 선발하려 하였다.
그런데 조직의 구심으로서 원화를 여성으로 내세운 점, 그것도 복수라는 점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원래 조직을 둘로 나눈 것은 상호 건전한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능력을 배가시키려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최초의 원화였던 남모와 준정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 후자가 전자를 몰래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새로운 인재 양성의 방식을 추구해 가는 가운데 벌어진 사건 으로서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원화제의 실패로 한동안 인재 양성의 방식은 다시금 모색되었다.
화랑도 창설의 배경
그 뒤 상당한 기간이 경과하고 나서 새로 마련된 것이 화랑도(花郞徒)였다. 이제는 여성이 아니라 화랑이란 남성을 구심으로 내세웠다. 화랑은 여성처럼 화장을 한 꽃미남을 뜻하므로 원화제의 잔영을 그대로 남기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은 강제적으로 조직한 것이 아니라 자발성을 지닌 조직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구성된 조직도 꼭 2개로 제한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놓아두었다. 실패한 원화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였다. 화랑제 운영의 특성이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 국가가 주도해 조직을 결성한 것이 아니며 측면에서 지원만 하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마치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화랑도는 순전한 국가조직이 아니라 반관반민적 성격의 특수한 조직이었다고 함이 적절하다.
화랑도 창설 시기
화랑도가 조직된 시점은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말년인 37 년(576) 창설된듯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신라가 대가야를 대상으로 마지막 총공세를 가하던 562년 당시 화랑으로서 사다함이 등장하는 사실로 미루어 이때를 성립의 하한으로 한다. 『삼국유사』에는 최초의 화랑으로서 설원랑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여하튼 화랑도가 정식 출범한 시점을 명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다만, 화랑도 조직의 창설과 관련해서는 진흥왕대 에 활약한 명신 거칠부를 잠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화랑도의 교육 내용이 출사하기 이전 그의 어린 시절 경험과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거칠부는 관료로 나아가기에 앞서 승려로서 출가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때 전국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국경을 넘어 고구려에까지 들어가 고승 혜량을 만나 그가 진행한 강경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귀국한 뒤 성년이 되어 관료로 진출하였다. 이때 천하를 주유하면서 만났던 여러 승려를 비롯한 수많은 문사들은 『국사』를 편찬하는 데 동원되었다. 어린 시절의 체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거칠부가 경험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화랑들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화랑도 수련
화랑들은 도의를 닦고 가락을 즐기며 전국의 산천과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지형지세를 익혔다. 그를 통해 상호 협동하고 단결 하면서 심신을 연마하고 풍류를 즐기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그들의 활동무대 가 전국적이었다는 점은 주목해 볼만하다. 이런 경험들은 뒷날 군사 활동을 하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였을 터이다. 이런 모습들은 혼자였는지 아니면 여럿이 그룹을 구성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거칠부가 출사하기에 앞서 경험한 것들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그가 출가한 자체는 물론 혜량을 만난 사실도 각 별히 주목된다. 그와 관련지어 화랑도의 조직 구성을 살피면 흥미로운 점이 엿 보이기 때문이다. 화랑도는 상징적 대표인 화랑과 그 구성원인 낭도들로 구성된 조직이 다. 이들이 모두 15세 이상 19세 사이의 미성년자였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화랑도 조직 속에는 이들 외에도 승려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비 승려인 사미승은 몰라도 정식의 비구승은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만 출가가 가능하였다. 승려가 됨으로써 그들은 자연히 면세면역의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 서 화랑도 조직 속에 들어 있는 승려는 결코 미성년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크게 보면 화랑도의 구성원이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승려들의 이름자 끝에 이따금씩 사가 붙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당시 최고의 지식층으로서 어린 화랑과 낭도들을 가르쳤다. 대체로 문자를 중심으로 경전 등 습득해야 할 기본적 소양이 교육 내용이었다.
그들이 화랑도에 배속된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승인을 받아서였다. 화랑도 조직을 단순히 완전한 민간 기구로 볼 수 없는 근거의 한 가지가 여기에 있다. 승려들은 교사로서 화랑도들을 가르치면서 마침내 그들의 장단점과 능력, 잘잘못 등을 살펴 인사에 반영되도록 고과해서 국가의 요청에 따라 천거하 는 역할까지 맡았다. 뒷날 8세기 초에 이르러 진골귀족 김대문이 화랑들의 전기인 『화랑세기花郞世記』를 저술해 ‘현좌와 충신이 이로부터 우뚝 솟아 나고 양장과 용졸이 그로부터 나왔다’고 화랑 출신자의 역할을 한마디 로 총평한 점은 주어진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였음을 잘 보여 주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거칠부가 출가해 경험한 일, 혜량을 만난 일, 그들이 전륜성왕의 구심으로서 황룡사 창건을 건의해 실현시킨 점 등을 고려하면 두 사람의 건의로서 실현된 것이 화랑도 조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흥륜사의 승려였던 진자사와 미시랑의 설화적 이야기가 시사해 주듯이 신라인들은 화랑을 미륵의 화신이라 여기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미륵은 미래에 구원을 위해 나타날 부처인데 그것이 화랑의 모습으로 현실의 신라에 나타난 것으로 여겼다. 그런 의식 속에는 그들의 힘에의해 신라가 장차 이상향으로서 미륵의 세계를 구현해 주리란 기대와 희구가 깔려 있었다. 미륵의 세계는 전륜성왕으로 자처한 진흥왕이 꿈꾼 이상세계이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화랑은 진흥왕이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한 신라의 국가상을 만들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재의 대표이며, 화랑도는 그 전위조직이었다.
진흥왕이 그처럼 새로운 인재 양성을 통해 바란것은 바로 개국이란 새로운 국가상의 정립이었다. 이처럼 화랑도는 진흥왕이 친정한 뒤 황룡사 창건을 계기로 해서 거칠부와 혜량의 건의를 받아 창안해낸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신흥 조직이었다. 창설되자마자 가야 정벌에 따라나선 사다함이 보인 행태는 이후 본받아야 할 행위의 전범으로 자리 잡았다. 화랑도 조직은 일시로 끝난 것이 아니라 승계되었다. 점차 여러 화랑도 조직이 출현하였고 그들 사이에 저절로 경쟁이 벌어졌다. 각각의 조직은 나름의 특색과 지향을 지녔으며 이에 따라 그를 나타내 는 조직의 독자적 명칭을 갖고 있었다. 김유신이 소속한 화랑도는 미륵신앙에 무게를 둔 ‘용화향도’란 명칭을 갖고 있었다.
화랑도 덕목
이들에게는 황권, 또는 풍류황권이라 불리는 명부가 있었다. 화랑도는 성년이 된 뒤 출사를 위해 조직을 떠나야 했으므로 그때 이름이 지워졌지만 새로운 인물들이 채워짐으로써 각각의 조직은 계승되어 갔다. 이처럼 화랑도는 진흥왕이 신라 국가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데 소요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창안한 조직이었다. 승려가 교사로서 참여한 점, 불교식 왕명이나 진흥왕의 전륜성왕 의식에서 드러나듯이 현실에서 이상세계를 구현해내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심어진 교육의 내용은 불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실상은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도, 친구 간의 신의 등이 기본 덕목이었다.
| 화랑도 덕목 | 
뒷날 이것들이 고승 원광이 정리한 세속오계로 정리되었지만 신라에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덕목이었다. 말하자면 불교의 미륵세계를 이상향으로 추구하면서 정작 현실의 정치사회에 소요되는 덕목으로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화랑도 조직은 겉으로는 불교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유학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따라서 시대가 진전되어 가면서 그 속에 들어있던 종교적 요소보다 현실적 요소가 자연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화랑도는 한시적 유용성만을 가진 인재 양성의 한 방식이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