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이제까지 왕릉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높지 않았는데 거의 비슷하게 생긴 것처럼 보이는 왕릉은 개별 왕릉 하나하나에 대한 역사와 문화에 얽힌 이해 없이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 왕릉의 주인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정치를 펼쳤고, 후대의 왕은 선왕과 어떤 관계였고, 당시 왕릉을 조성할 때는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를 안다면, 처음에는 엇비슷해 보여 구별이 가지 않던 왕릉의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모든 조선 왕릉은 그 자체로 조선왕조실록인 셈이다.
조선왕릉은 어디에 위치했을까?
조선 왕릉은 도성을 중심으로 십리(4킬로미터) 밖, 백리(40킬로미터) 안의 길지(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왕릉은 전체 마흔두기 가운데 남한에 40기가 있으며, 그중 31기가 경기도에 있다(개성에 2기, 서울에 8기, 영월에 1기) 조선 왕실에서는 수도권 주변 길지에 나누어 능역(능이 있는 구역)을 조성했기 때문에 경기도 곳곳에는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는 아름다운 숲과 능원이 있다.
수십만에서 수천만 평에 이르는 왕릉에는 민가나 사가의 무덤을 조성할 수 없기 때문에, 왕릉은 수도권 지역에 남아 있는 가장 성스러운 녹지 공간이자 천년의 숲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남양주 광릉수목원, 고양의 서오릉, 화성의 융건릉, 여주의 영릉 등이 모두 그러한 곳이다. 조선 왕릉은 519년 동안 왕실에서 철저히 관리해왔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다소 훼손되었다. 다행히 지금까지 문화재청에서 특별히 관리하고 있어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며, 다른 시대 왕릉과 비교했을 때도 가장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설계
우리나라 왕릉의 원형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져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로 이어졌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 독창성과 높은 완성도를 갖게 된다. 능선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중층적인 조선 왕릉은 폐쇄성과 안정성을 확보한 공간에 입지하고 있다. 그러나 능침(봉분)은 반드시 능역 앞의 시계를 넓게 확보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조선 왕릉은 좌청룡 우백호의 능선과 계류가 감싸고 내려와 입구가 오므라진 산세가 있는 곳에 조영되었는데, 입구가 오므라지지 않은 곳에는 보호막 역할을 하는 비보림과 연못을 조성 하기도 하였다.
| 조선왕릉 |
능원의 시설물은 유교의 위계성에 따라 능침(봉분)-장명등-정자각-홍살문의 순서로 직선 축을 이뤄 이어진다. 능역의 규모가 이에 적합하지 않은 곳은 조영 방식을 달리하며 자연 지형에 적합한 구부러진(절선) 축을 이루기도 했다. 재실-금천교-홍살문을 잇는 능역의 참배로는 능역내의 명당 수가 흐르는 개천을 따라 구불구불한 곡선 형태로 나있다. 능원 공간의 신성함과 엄숙함을 나타내기 위해 참배객이 능원에 진입할 때 능침이 직선의 형태로 보이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조선 왕릉의 입지와 조영물의 축조는 전후방 산의 형태와 주위 지형을 충분히 고려하여 위치와 규모 등 을 결정한다. 능원(역)을 자연환경의 일부로 여기는 한국인의 자연스러운 생각과 풍수사상 때문이다. 조선 왕릉은 유교 예법에 따라 진입 공간-제례(향) 공간-(전이 공간)-능침 공간이라는 기본 구조를 가 지고 있다. 능원의 공간별 시설들을 살펴보면 진입 공간에 홍살문, 재실, 금천교 등이 있으며, 제향 공간에는 홍살문, 참도, 수복방, 수라간, 정자각 등이 있다.
전이 공간에는 예감, 소전대, 비각, 산신석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능역의 중심인 능침 공간에는 봉분, 석양과 석호,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 곡장 등이 있다. 이 밖에 향탄산, 능원 사찰 등이 능역 외곽에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능역의 공간 구성 요소는 능을 향하여 진입하는 동선을 중심축으로 배치된다.
능침 공간은 왕릉의 핵심으로, 봉분의 좌우 후면 삼면에 담을 둘렀으며(이를 곡장이라고 한다), 그 주변 은 소나무로 둘러싸서 능의 위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능침 공간의 주요 시설은 봉분이다. 봉분은 원형이며, 방위를 십이병풍석 또는 십이지간의 그림과 글자로 표시해놓았다. 능침 공간은 가로 방향으로 장대석을 설치하여 공간을 3단으로 나뉘었다. 봉분이 가장 위쪽에 있으며 죽은 자의 침전(임금의 침방이 있는 전각) 기능을 한다. 다음 단은 중계라고 해서 문인의 공간으로 문인석상과 석마가 있다. 세 번째 공간은 하계로 무인석상과 석마가 함께 있다.
이 능침 공간은 선왕만 머무는 곳으로, 산 자의 접근이 엄격히 제한되었다. 제향 공간은 참배하는 곳으로 사자와 생자가 제의 때 만나는 반속세의 공간이다. 정자각과 홍살문을 잇는 선을 따라 참배로가 2~3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제례의 시작인 배위를 지나 참도의 양옆으로 수라간, 수복방이 있다. 참도의 구성 형태는 종묘, 사직과 더불어 직선의 형태를 이루며, 참도의 경우 제의가 동남쪽 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에서 끝나는 행위에 따라 절선형을 이루고 있다. 동남쪽에서 시작하여 서북쪽에서 끝나는 것은 탄생과 죽음을 나타내기 위한 방위적 질서 체계이다.
| 조선왕릉의 구조 |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정수
조선 왕조 500년의 압축 조선 왕릉은 조상에 대한 효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권에서 당대 최고의 예술과 기술을 집약시킨 문화유산 이다. 같은 시기 다른 유교 문화의 왕릉과 비교해도 탁월한 완성도와 독창성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조선 왕릉에는 한국인의 자연관과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고, 음양사상, 풍수지리설, 불교, 도교 등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특히 조선 시대의 정치적 통치 이념인 유교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 조영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 갖는 보편적 가치
역사가 긴 동일 왕조의 문화 유산, 오랜 세월에 걸친 조성과 완벽한 보존, 조영 방식의 독창성, 제례문화의 장구한 전통, 당대 기록물의 보존성, 역사 경관적 가치, 현존하는 제례 문화 등이 담긴 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조선 왕릉이라는 훌륭한 문화유산을 어떻게 잘 관리하고, 전 세계인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낼지에 대한 숙제가 남았다.
마무리
조선 최고의 명당인 왕릉은 그 자체로 훌륭한 자연학습장이다. 뿐만 아니라 이야깃거리와 볼거리, 체험할 거리도 많으니 개발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문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원형과 거기에 깃든 생각을 훼손하지 않고 잘 살려 세계인이 향유하는 문화 유적으로 개발하고 관리해야 한다.